일반 산행 사진

(양주시)천보산 산행

꽃거리 2015. 9. 25. 05:39

位 置 ; 경기양주시 봉양동, 회암동 / 포천시 설운동있는산.

 

산행일자 : 2015년 9월 20일

 

날     씨 :

카 메 라 ;라이카 

산 악 회 ;

 

산 행 지 : 천보산 423m칠봉산506m

 

산행시간 : 시간분

 

산행거리 : km

 

참가인원 : 명

 

산행코스 :

 

이동수단 ;

 

숙   박 ;

 

특이사항 ; 100대명산 선정 사유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는 나옹선사(1329~1376)의 부도비로, 1377년(고려 우왕3)에 세워진

고려시대의 비이다. 현 회암사 뒤편 언덕에 나옹부도와는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비의 형식

은 당비를 닮은 복고풍으로, 이수(머리 부분에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것)를 따로 만들

지 않고 비신 상부에 쌍룡을 조각하고  그 중앙에 제액을 만들어 6자를 새겼다. 귀부는 화강

암으로 풍화가 심해서 자세한 조각을 알 수 없으나, 머리는 크고 목은 바트며 등에 얇은 비좌

가 있음이 확인된다. 비신은 대리석으로, 자경은 2~2.4cm,전액의 자경은 11.2cm이다. 비문

은 목은 이색이 짓고, 권중화가 글씨를 쓰고 전액도 하였다. 비의 글씨 이는 예서체로,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와 중원고구려비 이후 처음이다. 고려시대에는 구양순체나 왕희지체가 유행하

고 예서체의 사용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이 당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서가 쓰여지지않아

 선각왕사비는 당시의 예서 연구의 정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예라 할 수 있다. 비문에 따르면

왕사의 휘는 혜근, 호는 나옹 또는 강월헌 초명은 원혜이고, 영해부사람이며, 선각은 시호이다.

1320년(충숙왕7)에 태어나 1344년에 회암사에 입문하였다. 1348년에는 원나라에 가서 지공에

게 법의ㆍ불자ㆍ범서를 받았다. 1358년(공민왕7)에 귀국하여 왕이 가사와 불자를 하사하고 신

광사에 기거할 것을 청했으나 굳이 사양하고 구월산ㆍ금강산등에서 은거하다가 회암사에 들어

와 절을 크게 중창하고 1377년에 신륵사에서 57세로 입적할 때까지 불법을 행하였다.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 비신이 파손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존처리를 실시한 후 보존

관리상 2001년도에 경기도 박물관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귀부가

그대로 있으며 현장에는 원형을 본 딴 비가 세워져있다.






회암사 무학대사홍융탑(檜巖寺 無學大師洪融塔)

보물 제 388호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 활동한 승려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의 부도로 조선 태종 7년(1407)에 건립되었다. 부도(浮屠)는 승려의 사리(舍利)나 유골을 모신 탑 무덤<묘탑;墓塔>이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은 경배의 대상이나 부도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며, 보통 절의 경내 외곽 지역에 위치한다. 우리나라에서는 9세기경인 통일신라 후기 이후에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고승 신앙의 한 형태로 부도가 크게 유행하였다.

 

회암사 무학대사홍융탑 앞 쌍사자석등(檜巖寺 無學大師洪融塔 앞 雙獅子石燈)

보물 제 389호

무학대사(無學大師, 1327-1405) 부도 앞에 세워져 있는 이 석등은 전체적으로 평면이 사각형의 형태로 간주석에 두 마리의 사자가 배치되어 있어 쌍사자 석등이라 불리고 있다. 석등은 등불을 놓아두는 곳으로 주로 불전 앞에 세웠다. 불교에서는 죽은 이를 위하여 탑묘 앞에 등불을 밝히면 다시 태어나 청정(淸淨)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더불어 등불을 밝히는 것을 공양 중에서도 으뜸으로 여겼으므로 공양도구로 제작되었다.

 

무학대사 비(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51호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

조선 초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대사 자초(自超, 自師, 1327-1405)의 비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33대 화상으로 유명한 지공나옹무학의 부도가 있는 회암사 터에 세워져 있는 이 비석은, 조선 태종 10년(1410) 왕명에 따라 변계량(卞季良)이 글을 짓고 공부(孔俯)가 글씨를 써서 세워졌으나 순조21년(1821)에 인위적으로 파괴되어 후에 다시 세워졌다.

자초는 18세에 승려가 되어 용문산의 혜명에게 불법을 배운 후 묘향산 금강굴 등을 찾아 수도하였다. 고려가 멸망한 후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자초를 왕의 스승인 왕사(王師)로 책봉했고, 묘엄존자(妙嚴尊子)라는 칭호를 붙여 주었다. 자초는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指空禪師浮屠 및 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9호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 8-1

회암사는 고려 말 조선 초에 선종(禪宗)의 맥을 형성했던 승려 지공(指空)·나옹(懶翁)·무학(無學)이 머물며 포교했던 곳으로 유명한 절이다. 절의 동쪽 능선에 세 승려의 부도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위쪽에 있는 것이 나옹의 부도와 석등으로 고려 우왕 21년(1372)에 건립되었다.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부도비(楊州 檜巖寺 指空禪師浮屠碑)

지공선사의 부도 앞에 있는 이 부도비는 지공선사의 유래를 기록한 비이다. 원래의 부도비는 이색이 찬하고 한수가 글씨를 써서 1378년(우왕4년)에 건립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부도비의 건립연대는 '숭정기원후사무자오월일립(崇禎紀元後四戊子五月日立)'으로 기록되어 있어, 1828년 순조 28년에 중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부도비 옆에는 비의 귀부(龜趺) 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지공선사 부도비의 귀부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도비 형태는 옥개석(屋蓋石)·비신(碑身)·비좌(碑座)·지대석(地臺石)의 구조이다.

규모는 옥개석이 140×78×50cm, 비신이 96.7×27.5×238cm, 비좌가 147.5×78.5×63cm, 지대석이 165×211×19cm로 총 높이는 370cm이다.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懶翁禪師浮屠 및 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 8-1

고려 후기의 승려인 보제존자 나옹(懶翁)의 부도와 석등이다. 부도는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건조물로 우리 나라에서는 9세기경인 통일신라 후기에 선종의 발달과 더불어 고승신앙의 한 형태로 크게 유행하였다. 부도의 구조는 몸돌을 받치는 기단부와 몸돌 위에 있는 지붕돌 ·상륜부로 이루어져 있다. 석등이란 어둡고 깜깜한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깨달은 진리로 비추어서 불성(佛性)을 밝혀주는 법등(法燈)이다. 대개 절의 중앙에 배치되지만 나중에는 승려들의 무덤인 부도 앞에도 세워지게 되었다.




 회암사지 당간지주(경기도 향토유적 제13호)

회암사지 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

 

 

(회암사지의 소개)

○ 지정일자 : 1964. 6. 10

○ 지  정 별 : 국가사적 제128호

○ 지정면적 : 322,801㎡(사적 33,022㎡, 보호구역 289,779㎡)

○ 소 재  지 : 양주시 회암동 산14-1번지 일원

 

회암사지는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에 위치하며, 왕실의 후원을 받아 많은 불사가 이루어진 조선전기 최대의 사찰로서 크게 번영하였던 곳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회암사지는 경기도박물관과 경기문화재연구원에 의해 1997년부터 연차적인 발굴조사를 통해서 그 규모가 드러나게 되었는데, 가람의 배치가 평지가 아닌 산간에 위치하면서도 8단의 단축을 이루면서 남쪽에 회랑(回廊)을 두고 있는 점은 고려시대의 궁궐이나 가람배치의 특징과 같아서 주목되고 있다.

또한 남북의 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면서 모두 64개소의 건물을 배치하여 종교적인 공간으로서의 특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각 건물의 기능적인 용도에 따라서 건물의 형태를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회암사 가람의 특징은 남북축 선상에 건물을 배치하는 가람 배치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왕실 사찰로서의 성격에 부합되도록 건물을 배열하고 위계를 설정하면서 나타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회암사지 발굴, 조사에 출토된 기와, 도자 등의 다양한 유물들은 왕실사찰로서 회암사의 위상과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 회암사지는 출토된 유물을 보존하고 연구하기 위한 전시관 건립과 유적지 정비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 회암사의 역사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고려 명종4년(1174)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를 들렀다는 기록이 있어서 12세기 후반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회암사는 인도승 지공의 '삼산양수간(三山兩水間)에 가서 절을 세우면 나라와 법이 흥한다.'라는 말에 따라 나옹이 고려 후기에 대대적인 불사(佛事)를 주도하여 사역(寺域)이 확장된 이후 조선전기까지 왕실을 중심으로 많은 불사(佛事)가 이루어지면서 최대 규모의 사찰로서 크게 번창하였다.

현재 회암사지에는 회암사지 부도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와 회암사지 맷돌(경기도 민속자료 제1호)이 있으며, 회암사지 위쪽에 새로 창건된 회암사에는 회암사지 선각왕사비(보물 제387호)의 복원작과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보물 제388호), 회암사 무학대사홍융탑 앞 쌍사자석등(보물 제389호), 회암사지 지공선사부도비(경기도문화재자료 제135호)가 있어서 회암사의 역사를 말해준다. 

 

○ 고려시대의 회암사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원(元)나라를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온 인도 승려 지공(指空)과 그의 제자인 나옹(懶翁)이 회암사에 머물면서 전법(傳法)활동을 하면서부터 대찰(大刹)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 전기 이색(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는 고려 우왕2년(1376)에 지공의 제자인 나옹이 이곳에 가람을 이룩하면 불법이 흥할 것이라는 믿음에 따라서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나옹은 회암사의 중창을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한 후 제자인 각전(覺田) 등이 262칸에 이르는 대규모의 사찰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고려 말에 회암사는 전국 사찰의 본산(本山)으로 3,000여명에 달하는 승려가 머물었다고 전하고 있어서 당시 사찰의 규모와 위용을 말해준다.

 

○ 조선시대의 회암사

조선시대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책 속에서도 태조 이성계는 나옹의 제자이자 자신의 스승인 무학(無學)을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재정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며, 불사(佛事)가 있을 때마다 신하를 보내 참례(參禮)하도록 하였고, 왕위에서 물러난 후에는 이곳에서 수도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김수온(金守溫)이 쓴 [회암사중창기(檜巖寺重創記)]에 의하면 성종3년(1472)에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명종 때에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보우(普雨)를 통해서 불교 중흥책을 펼치면서 회암사는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크게 번영하였고, 문정왕후의 사후에 다시 억불정책이 대두되면서 사세가 급격히 기울게 되었다.

회암사의 정확한 폐사 시기나 동기는 알 수 없지만, [명종실록(明宗實錄)]에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명종21년,1566)"라는 기록이나 [선조실록(宣祖實錄)]에 "회암사 옛터에 불탄 종이 있다.(선조28년,1595)"의 기록을 볼 때 1570년 경에 유생들에 의한 화재로 회암사가 소실되면서 폐사(廢寺)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f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