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이기대
☞위 치 : 부산광역시 남구 이기대공원로 68(용호동) 일원
☞산행일자 : 2016년4월4일
☞카 메 라 ; 캐논 EOS 5D Mark III
☞날 씨 :흐림
☞산 악 회 ;
☞산 행 지 : (부산시)이기대
☞산행시간 : 시간 분
☞산행거리 : .km
☞참가인원 :
☞산행코스 :
☞이동수단 ;
☞숙 박 ;
☞백대명산 ;
☞특이사항 ;
이기대 공원(二妓臺公園)은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 산25번지 근처에 위치한 공원이며, 흔히 '이기대'라고 부르나,
정식 명칭은 이기대 도심 자연 공원이다. 이 공원은 해안 일대에 걸쳐 특이한 모양의
암반들이 약 4㎞정도로 이루어져 있다. 광안대교의 조망 및 사진 촬영 장소로도 이용된다.
현재 환경 파괴로 논란이 되고 있다.
이기대의 명칭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동래영지》(東萊營誌)에 의하면, 좌수영 남쪽으로 15리에 '
두 명의 기생(二妓)'의 무덤이 있어 이기대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민간에 의해 구전되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기생 두 명이 왜장을 술에 취하게 한 뒤 껴안고
바다에 뛰어내렸기 때문에 이기대(二妓臺) 또는 의기대(義妓臺)가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장산봉이 바다로 면한 동쪽 바닷가에 있는 대(臺)로 용호3동에 속한다. 용호하수처리장에서 고개 하나 넘은 곳에 있다.
장산봉(225.3m)이 바다로 면한 동쪽은 기기묘묘의 바위절벽으로 경관이 뛰어났지만 사람들이 오가기 위험하다.
그래서 바다서 배로 그 경관을 즐긴다.
그러나 이기대 중심자리는 직각으로 된 절벽이 아니라 바다에 접한 암반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평면에 가깝게 된 곳이
산을 따라 2km정도 바닷가로 이어져 있다. 그 바위반석에서 동해를 바라보는 경관과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보는 경관이
빼어났을 뿐 아니라 낚시꾼의 낚시터로 아주 좋은 곳이다. 그 동안 군작전지구가 되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었다가
1993년에야 개방 되었다.
A코스: 성모병원 앞 교차로 또는 백운포체육공원에서 하차
~진주횟집~선착장~이정표~농바위~밭골새
~치마바위~어울마당~동굴~출렁다리~섭자리~동성말
~LG메트로시티옆 분포고교앞도로 버스대기
B코스: 성모병원 앞 교차로 또는 백운포체육공원에서 하차
~백운고개~정자~장자산~정자~밭골새
~치마바위~어울마당~동굴~출렁다리~섭자리~동성말
~LG메트로시티옆 분포고교앞도로 버스대기
A코스는 둘레길 6.5km (약2시간: 점심포함)
B코스는 산행+둘레길 6km
코스 설명 부산 남구 용호동 이기대도시공원의 해안가 둘레길을 걷으면서 오륙도 섬을 가까이서 보고 다시 광안대교의 웅장함을 보는것으로 백운포체육공원에서 출발A,B조 각각 출발하여 둘레길 중간지점 밭골새에서 만나 어울마당주변에서 광안대교와 동백섬을 보면서 점식식사를 하고, 식사 후 광안대교를 보고 걸으며, 부산의 바다명소를 맘껏 누릴 수 있는 최대의 관광명소인 오륙도와 광안대교 멀리 동백섬의 누리마루와 광안해수욕장을 그리고 도시의 맛을 함께 즐기는 코스
이기대라는 명칭의 유래는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다음 3가지 설로 요약된다.
첫째는 조선시대 좌수영의 역사와 지리를 소개한 동래영지(東來營地-1850년 좌수사 李亨夏 편찬)에서
이기대라고 적고 있고 좌수영에서 남쪽으로 15리에 있으며 위에 두 기생의 무덤이 있어서 이기대라고 말한다고 할 뿐
구체적인 내용은 없다.(在營南十五里 上有 二妓臺云).
둘째는 경상좌수사가 두 기생을 데리고 놀아서 이기대라고 하였다는 말도 있으나
옛날 큰 벼슬을 한 관리들은 가는 곳마다 기생놀이를 했고 그래서 이기대라고 했다는데
근거 없는 말이 아닐 수는 없으나 천민에 속했던 두 기생의 무덤이 있다고 경관이 빼어난 곳의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도 일반적인 견해이다.
셋째는 수영의 향토사학자 최한복(崔漢福 : 1895∼1968)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수영성을 함락시키고는
부근의 경치 좋은 곳에서 축하잔치를 열었는데 그 때 수영의 의로운 기녀가 자청해서 잔치에 참가하여
왜장에게 술을 잔뜩 권하여 술에 취하게 한 후 왜장을 안고 물 속에 떨어져 죽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二妓臺가 아닌 義妓臺가 맞는 이름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그런데 이기대(二妓臺)의 명칭은 공부(公簿)라고 할 수 있는 東來營地에서 이미 150여년 전에
종전의 기록을 근거로 二妓臺라고 하였으니 가장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