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태백)함백산.咸白山 산행
☞위 치 :강원도 태백시 소도동과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 경계에 있는 산.
☞산행일자 : 2016년12월31일
☞카 메 라 ; 캐논 EOS 5D Mark III
☞날 씨 :맑음
☞산 악 회 ;
☞산 행 지 :함백산.咸白山(1,573m)
☞산행시간 : 시간 분
☞산행거리 : 11.5km
☞참가인원 :
☞산행코스 :
☞이동수단 ;
☞숙 박 ;
☞백대명산 ;
☞특이사항 ;
(함백산(咸白山1,572.9m)소개)
높이 1,572.9m. 태백산맥의 줄기인 중앙산맥에 속하는 산으로 북쪽에 대덕산(大德山, 1,307m),
서쪽에 백운산(白雲山, 1,426m)과 매봉산(梅峰山, 1,268m), 서남쪽에 장산(壯山, 1,409m), 남쪽에 태백산(1,547m)
동쪽에 연화산(蓮花山, 1,171m)·백병산(白屛山, 1,259m) 등이 솟아 있다.
정암사(淨巖寺) 부근에서 서북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사북읍에서 동남천(東南川)이 되어 북서쪽으로 흐르면서
낙동리에서 서쪽으로 유로를 변경하여 곳곳에 하안단구(河岸段丘)를 형성하며 가수리에서 남한강으로 흘러든다.
구래리 부근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수계는 남한강의 지류인 옥동천(玉洞川)의 상류를 이룬다.
남한 지역의 무연탄 생산의 중심을 이루는 지역으로서 산업철도인 황지지선(黃池支線)과
고한선(古汗線 : 현재는 태백선으로 통합)이 부설되면서 활발히 개발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동쪽 사면에는 어룡광업소를 비롯하여 대명탄광(大明炭鑛)·풍전탄광(豊田炭鑛)등이 있고,
남쪽에는 함태광산(咸太鑛山) 이 있다.
서쪽 사면의 고한읍 지역에는 사북광업소를 비롯하여 정동광업소·세원광업소·삼척탄좌·정암광업소·삼덕탄광 및
서진탄광 등이 개발되어 있다. 고한과 황지를 연결하는 태백선의 정암터널 공사는
우리 나라 철도 건설 사상 난공사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으며, 추전역[杻田驛]은 남한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철도역으로 알려져 있다.
주변 지역은 산악지대이나 자원개발을 위한 산업도로가 각 광업소와 철도역 사이에 연결되어 있고,
특히 태백시와 상동읍 사이에는 국도가 완전히 포장되어 있다. 최근에는 희망재에서 상동의 구래리까지
서쪽 계곡을 따라 도로를 신설, 포장하여 종전의 국도보다 더욱 안전하게 되었다.
서북쪽 산록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여
건립한 절로 알려지고 있는 정암사가 있다. 이곳에는 보물 제410호로 지정된 정암사수마노탑(淨巖寺水瑪瑙塔)과
천연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된 정암사열목어서식지가 있다.
태백시 쪽 사면에는 심적사(心積寺)라는 절이 있다.
함백산 등산코스 (산행코스)
● 만항재 - 함백산 - 중함백 - 은대봉 - 두문동재 (10km, 3시간40분)
● 만항재 - 함백산 - 중봉 - 만항재 (5km, 3시간)
● 만항재 - 함백산 - 중함백 - 쉼터갈림길 - 적조암삼거리 - 적조암입구 - 정암사 (3시간30분)
● 두문동재 - 은대봉 - 샘터 - 중함백 - 함백산정상 (7.3km, 3시간20분)
● 화방재 - 수리봉 - 창옥봉 - 만항재 - 함백산정상 (6.8km, 2시간50분)
● 적조암삼거리 - 샘터 - 중함백 - 함백산정상 (5km, 2시간20분)
함백산의 등산코스를 확인하면서 자차로 갈 경우 원점회귀가 참 만만치 않은 곳이네요.
이곳은 택시도 별로 없는데 콜을 하면 두문동재~만항재가 약 22,000~25,000원이라고 하네요
버스는 신고한에서 만항마을까지 운행하는 버스가 있기는한데 시간 맞추기가 만만치 않겠어요.
두문동재와 만항재 사이를 오가는 교통편이 겨울에는 준비되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은 희망사항이니
두문동재 또는 만항재에서 택시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버스시간을 잘 맞추어 운좋게 버스를 타거나 만항재에서
함백산 정상을 갔다가 다시 만항재로 오거나 아니면 좀 걷더라도 적조암쪽을 코스로 잡아서
정암사까지 다녀오는 코스 등이 자차로 이동할 경우의 경우의 산행방법이 아닌가 합니다.
정암사 (淨巖寺)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리태백산(太白山)에 있는 절. | 내용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우리 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의 하나로서 갈래사(葛來寺)라고도 한다. 신라의 대국통(大國統)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사적기(事蹟記)에 의하면 자장율사는 말년에 강릉 수다사(水多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꿈에 이승(異僧)이 나타나 “내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라고 하였다. 아침에 대송정에 가니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내현하여 “태백산 갈반지(葛磻地)에서 만나자.” 하고 사라졌다.
자장율사는 태백산으로 들어가 갈반지를 찾다가, 어느 날 큰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고 제자에게 ‘이곳이 갈반지’라 이르고 석남원(石南院)을 지었는데, 이 절이 정암사이다.
이 절에는 자장율사와 문수보살 사이에 있었던 유명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장이 이곳에서 문수보살이 오기를 기다리던 어느 날, 떨어진 방포(方袍)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 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시자(侍者)가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나무라자 거사는 스승에게 아뢰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시자가 자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처 깨닫지 못하고 미친 사람으로 생각하여 만나지 않겠다고 하였다.
거사는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알아보겠는가.” 하고 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가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었으며, 그 보좌에 올라 앉아 빛을 발하면서 가 버렸다.
이 말을 들은 자장이 황급히 쫓아가 고개에 올랐으나 벌써 멀리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자장은 그 자리에 쓰러진 채 죽었는데, 뼈를 석혈(石穴)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또, 창건에 관한 일설에는 자장이 처음 사북리 불소(佛沼) 위의 산정에다 불사리탑(佛舍利塔)을 세우려 하였으나, 세울 때마다 붕괴되므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더니 하룻밤 사이에 칡 세 줄기가 설상(雪上)으로 뻗어 지금의 수마노탑(水瑪瑙塔)·적멸보궁·사찰터에 멈추었으므로 그 자리에 탑과 법당과 본당(本堂)을 세우고, 이 절을 갈래사라 하고 지명을 갈래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 중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자장율사가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자장율사가 이 절을 창건할 때 이 돌로써 탑을 건조하게 했다고 하여 마노탑이라 하였다 한다.
또한, 물길을 따라 이 돌이 반입되었다고 해서 수 자를 앞에 붙여 수마노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탑을 세운 목적은 전란이 없고 날씨가 고르며, 나라가 복되고 백성이 편안하게 살기를 염원하는 데 있다고 한다.에서 돌아올 때 서해 용왕이 자장율사의 신심에 감화되어 마노석(瑪瑙石)을 배에 싣고 동해 울진포를 지나 신력으로 갈래산에 비장해 두었다가,
보물 제410호. 높이 9m. 석탑은 정암사 적멸보궁(寂滅寶宮)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급경사를 이룬 산비탈에 축대를 쌓아 평평한 대지를 만들고서 석탑을 세웠다. 벽돌처럼 돌을 다듬어 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입니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면...
바닥돌은 모를 죽인 화강암 석재를 6단으로 쌓아 올려 구성하였는데, 맨 윗부분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2단의 굄을 또 다시 마련하였다. 몸돌을 구성하는 돌은 회녹색의 수성암질석회암을 길이 30∼40㎝, 두께 5∼7㎝의 크기로 다듬은 것인데, 다듬은 수법이 정밀하여 돌의 표면이 깔끔하게 잘 정돈되었으므로, 얼른 보아서는 마치 실제 벽돌을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1층 몸돌은 너비가 1.78m이고 높이가 1.03m로, 단면이 네모나게 15단으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 남쪽면 가운데에는 화강암으로 네모난 틀을 짜서 만든 감형(龕形)이 설치되어 있다. 문비(門扉)는 1장의 널돌로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세로 줄을 돋을새김하여 2짝의 문을 나타내었고, 문의 중심부에는 철로 만든 문고리를 달았다.
지붕돌은 전탑 특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추녀는 수평을 이루고 있지만 좁은 편이며, 전각(轉角)에는 위아래에 풍령(風鈴)을 달았던 구멍이 뚫려 있는데, 현재 윗층 지붕돌의 일부에는 풍경이 남아 있다. 밑면 받침은 1층이 7단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1단씩 줄어서 7층은 1단이다. 윗면인 낙수면의 층단도 1층은 9단이지만, 역시 위로 올라갈수록 1단씩 줄어서 7층은 3단이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노반(露盤) 위에 벽돌처럼 깎은 2장의 돌이 얹혀 있고, 다시 그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상륜이 설치되었다. 청동제 상륜은 꽃 무늬를 뚫새김으로 새긴 오륜탑(五輪塔)을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를 줄여 올려 놓고서, 그 위에 복발(覆鉢) 모양을 두었으며, 보륜(寶輪) 위에는 병(甁) 모양을 얹었는데, 병의 목에서 네 가닥으로 돌출된 끝부분에는 풍경이 달려 있다. 맨 꼭대기에는 윗부분이 바깥쪽으로 크게 굽은 수연(水煙) 모양을 올렸고, 병의 목에서 나온 쇠로 만든 자물쇠인 철쇄(鐵鎖)는 4층 지붕돌까지 연결되었다.
이 석탑은 규모가 거대한 편은 아니지만 형태와 조성 수법이 정교하다. 지붕돌 귀퉁이의 밑면이 위로 치솟은 것은 건립 시기의 양식을 잃지 않은 것이고, 청동제 상륜의 뚫새김 수법 또한 시대적인 특징을 보여 준다. 석탑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놓여 있는데, 조각된 연꽃 무늬나 안상(眼象) 무늬 등은 고려시대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석탑은 오래 전부터 각 층의 돌이 없어지거나 파손되어, 1964년부터 보수 문제가 논의되다가, 1972년에 해체 복원하였다.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3층 지붕돌~받침돌 사이에서 5개의 탑지석(塔誌石)이 발견되었고, 받침돌 맨 아래부분 밑의 적심부에서는 청동합(靑銅盒), 은제외합(銀製外盒), 금제외합(金製外盒) 등으로 구성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서 이 석탑이 조선시대 말기까지 여러 차례의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탑지석에 의하면, 현재의 석탑은 1653년(효종 4)에 중건되었다고 보여진다. 다만 석탑 앞의 배례석이나 정암사에 전하는 여러 유물을 비교하면, 이 석탑이 처음 건립된 시기는 늦어도 고려시대일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