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산행 사진

(남원)달궁.뱀사골계곡

꽃거리 2014. 8. 5. 06:00

☞ 位    置  :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에 소재한 계곡

☞카 메 라  ;  DSLR캐논 EOS 70D

☞산행일자 : 2014년7월31일

☞날     씨  : 흐리고비

☞산 악 회  ; 

☞산 행 지  : 달궁.뱀사골

☞산행시간 : 6시간

☞산행거리 : 15k

☞참가인원 : 6명

☞산행코스 :

☞이동수단 ;

☞숙     박  :

☞특이사항 ; 산림청 100대명산선정 이유:

뱀사골계곡

뱀사골계곡은 돌돌골이라고도 한다. 지리산 반야봉에서 반선(伴仙)까지 산의 북사면을 흘러내리는 길이 14km의 골짜기를 말한다. 지리산국립공원 안에 있는 여러 골짜기들 가운데서 가장 계곡미가 뛰어난 골짜기의 하나로 꼽힌다. 전구간이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이 계곡에는 100여 명의 인원이 한자리에 앉을 수 있는 넓은 너럭바위가 곳곳에 있고, 100여 개의 크고 작은 폭포와 소(沼)가 줄을 잇는다.
봄철에는 철쭉꽃이 계곡을 메우고, 가을철에는 빛깔이 다양한 단풍이 계곡을 덮으며, 또 여름철에는 녹음 짙은 계곡 안에 삼복더위를 얼어붙게 하는 냉기가 감돈다. 뱀사골이라는 이름은 골짜기가 뱀처럼 심하게 곡류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라고도 한다. 

뱀사골의 유래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전 현 지리산북부사무소 자리에 송림사(松林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의 실상사(實相寺)보다 100여 년이 앞선 대찰로 1년에 한 번식 스님 한 분을 뽑아 칠월백중날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하면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 하여 이 행사를 해마다 계속하였는데 이를 기이하게 여긴 고승이 독약이 묻은 옷을 스님에게 입히고 신선바위에 올라 기도듣리게 했다. 그 날 새벽 괴성과 함께 기도드린 스님은 간곳 없고 계곡내 용소에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 그 후 이 계곡을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절반의 신선〉의 준말로 마을을 반선(伴仙)이라 부르게 되었다.

 

 

4박5일 일정으로 휴가을 내어 어제 실상사을 둘러보고 대충 짐 정리하고 하루 저녁 푹자고

오늘부터 달궁 오토캠핑장에서 캠핑을 시작한다.

달궁의 소개
부르기 좋고 듣기에도 좋은 지리산 달궁은 입안에서 구르는 울림소리가 기가 막힌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지명이다.
사람들은 그 곳을 삼한시대에 마한 왕의 별궁이 있었다고 하여 월궁(月宮) 즉 달의 궁전이라고 알고 있으며 오래 전부터 달궁(達宮)으로 불리어 왔다.
산이 너무 깊어 한번 들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황천길 같기도 한 지리산 최대의 골짜기에 흐르는 역사마저 아득하다.
아득한 달궁의 역사는 도무지 닿지 않을 것 같은 옛 시간과 오늘의 시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다.
지리산의 달궁에 마한의 존재 설을 세상에 회자시킨 사람은 서산대사이다.
조선 중기 대에 지리산의 여러 사찰에서 수도정진을 한 서산은 “황령암기”라는 사기(寺記)를 기록하면서 지리산에 마한이 존재하였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달궁을 논하고 얘기할 때면 반드시 인용하고 써먹은 서산의 문집 청허당집에 실려 있는 황령암기 전문에 나오는 마한에 관한 대목이다.
(옛날에 漢나라 昭帝가 즉위한지 3년에, 馬韓의 왕이 辰韓과 辨韓의 난리를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황. 정의 두 장군을 시켜 공사를 감독하였으므로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재를 이름하고, 도성을 72 년 동안 보호하였다.)
한나라 소제(昭帝)의 등극이 BC 87/86 ~ 74/73 이기에 즉위 3년이라면 기원전 83년 경이 되며 마한이 지리산에서 소멸한 시기 역시 기원전으로 보아야 하기에, 서산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면 지리산 달궁의 역사는 이천 년이 넘는 세월이다.
이천 년 전 72년이라는 결코 짧지도 않은 통한의 세월을, 결사항전의 정신으로 치열하게 살아갔을 마한 사람들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별궁 터를 비롯하여, 지리산 고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채 허물어진 돌담과 꺼져가는 둔덕으로 남아있는 별궁을 지켜온 정령성과 황령성, 그리고 이천 년 세월에 버금가는 일천 오백 년 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던 황령암 폐사지는 달궁에서 잠자는 국보급 유물들이다.
그것들은 전설보다 더 희미하고 퇴락한 모습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후손들에게 지리산의 역사를 시공을 초월하여 전해주는 참으로 값어치 있는 메시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