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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수덕사.덕숭산 산행

꽃거리 2015. 11. 3. 06:14

 위     치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치리에 있는산.

산행일자 : 2015년11월2일

카 메 라  ; 캐논 파워샷 G7X.케논5D Mark III

날     씨  : 맑음

산 악 회  ; 

산 행 지  : 덕숭산 (德崇山)(495M)수덕사

산행시간 : 시간 분

산행거리 :  .km

참가인원 : 3명

산행코스 :

이동수단 ; 승용차

☞숙      박 ;

☞백대명산 ; 

 특이사항 ; 지역 주민들이 소금강이라고 할 만큼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경관이 수려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1973년)되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하여 선정

백제 제29대 법왕 원년(599) 지명법사가 창건한 수덕사(修德寺),

보물 제355호인 마애불과 덕산온천이 유명

 

덕숭산 소개

 

덕숭산은 호서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예쁘장하고 아담한 산으로 기슭에 수덕사를 품고 있으며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20㎞, 덕산면 사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방 현인들이 모여 수양을하다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여 수덕산이라고도 한다.

1973년 3월 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해발 580m의 덕숭산은 기암괴석이 풍부하여 바위들이 사람의 두개골이나

노적가리, 사나운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지닌 절묘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절경으로는 원효봉과 석문봉, 덕숭산과 해태바위등이 있다. 또한 수덕사를 비롯하여 정혜사, 만공탑,

여승당, 보덕사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충의사와 덕산온천 등 명소가 있다.

수덕산은 수덕사 등 사찰산행과 온천산행을 겸할 수 있지만 등산코스로는 가족나들이 코스 정도로 짧아

다소 아쉽다

 

윤봉길의사 생가 광현당

 

안중근 의사와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운 윤봉길의사가 태어나 살던 곳이다.

그가 살던 집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그의 유품들이 보존되어 있고, 그의 사당인 충의사도 있다. 

사적지로 지정된 윤의사의 생가는 시량리 목바리(沐溪)라 불리는 곳에 있다.
이곳은 가야산과 덕숭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해져 목바리 앞에서 작은 삼각주를 이루었다가 다시 덕숭산과

용봉산 사이에서 내려오는 시내와 합해져 온천 뜰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작은 시내가 만든 삼 각주에 윤의사의 생가인 광현당(光顯堂)이 있다.

현재 경내에는 윤의사의 동상과 그의 유품을 전시한 매헌기념관이 있다.


저한당

 

윤의사가 성장한 곳으로 1972년 8월까지 의사의 유족이 살았고, 1974 년에 증수되면서 저한당

(抵韓當 : 한국을 어려운 데서 건져낼 집이라는 뜻)이라 명명되었다. 1911년(4세) 3월에 부모를 따라

광현당에서 이 집으로 옮겨와 1930년(23세) 망명에 오를 때까지 생활했다.

서울시 서초구에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다.


덕산온천

 

덕산온천은 수덕사로 가는 중간 2㎞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약 136년전 순조왕때 약수로 개발되었으며

1927년 수질분석에 의하여 "지구유"라 하여 국내에서 제일 우수한 수질로 밝혀졌다.

수온은 섭씨 52 ℃ 안팎으로 수질은 알칼리성과 유황성분의 천연방사능천이다.
지하 210m까지 파고 들어가 끌어올린 온천수는 신경통, 만성피부염, 류마티스, 동맥경화등에 효험이 있다.

유일하게 온천수로서는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산온천은 인파가 적어 비교적 여유있는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인근에 덕숭산, 충의사, 매헌 유적지 등의 명소를 거느리고 있어

다양한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ㅇ 수덕사 소개

 

덕숭산자락에 위치한 수덕사는 국보 49호인 대웅전을 비롯 각종 문화재를 잘 간직한 고찰로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인하고 있다.

연혁 창건에 대한 뚜렷한 기록이 없어 창건설화가 분분하나, 사기(寺記)에는 백제말에 숭제법사(崇濟法師)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하며 제30대 무왕 때 혜현(惠現)이 (법화경)을 강론하였고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말에 경허(鏡虛)가 이곳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에 경허의 제자 만공(萬空)이

중창한 뒤 이 절에 머물면서 많은 후학들을 배출했다.

현재 우리나라 4대총림의 하나인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있으며 많은 수도승들이정진하고 있다.

산내 암자로는 견성암(見性庵)을 비롯하여 금선대(金仙臺), 환희대(歡喜臺) 등이 있으며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국보 제49호)을 중심으로 명부전, 백련당, 청련당, 조인정사, 일주문, 범종각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삼층석탑, 대웅전 내부의 고려벽화를 비롯하여 정헤사로 가는 중에

만공이 건립한 25척의 석불로서 머리에 이중의 갓을 쓰고 있는 미륵불입상(彌勒佛立像)과 만공을

추도하기 위해 세운 만공탑(萬空塔)등이 있다.

 

 

 



 

 


      

 

 

수덕여관 6인의 순정,사랑,예술,인생 이야기


수덕사 일주문 바로 왼쪽에 곧 쓰러질 것 같은
초가집 한 채가 수덕여관이다.

한때는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시인, 화가, 묵객들이 드나들던 여관은

주인도 객도 떠나가고 곰팡이 냄새 나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으로 나그네를 맞이한다.

이제 이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세 여자와 세 남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세 여자란 김일엽, 나혜석. 박귀옥(이응로 화백의 본부인)이고,세 남자란 송만공 스님,

이응로 화백. 김태신(일당스님=김일엽과 일본인사이에 난 사생아)을 말한다.

수덕사 일주문 옆에 있는 초가집 한 채는, 너무나도 유명한 당대에 쌍벽을 이룬

김일엽스님과 나혜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서린 곳이다.


한국 최초의 신시 여류시인 김일엽은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그의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수덕사견성암에서
탄옹스님으로 부터 수계를 받고 불가에 귀의하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스승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1934년 이혼 후 극도로 쇠약한데다, 어린 딸과 아들이 보고 싶어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나혜석은 수덕사로 직행하지 않고 수덕사 일주문 바로 옆에 있는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김일엽이 암자에서 내려와 두 사람은 반갑게 회포를 풀었지만,한 사람은 여성을

옥죄는 사회제도가 한없이 원망스러운 이혼녀이고,또 한 사람은 그것을 초월한

여승이었으므로,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렸다.

"너처럼 중이 되겠다"는 나혜석의 부탁에 "너는 안 돼"라고 일엽이 만류했지만

"조실스님(만공)을 뵙도록 도와줘"라는 나혜석의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김일엽은 만공스님 면담을 주선한다.

몇 년 전 경성에서 속세를 접고 여승이 되겠다고 속내를 털어 놓는 일엽에게

현실 도피의 방법으로 종교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라고 박을 주던 나혜석이 이제는

처지가 바뀌어 같이 머깎고 중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설적이지만 그만큼 이 땅에서

신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들었다는 것을 반증한다.만공선사로부터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일언지하의 거절을 당한 나혜석은

포기하지 않고 수덕여관에 5년 동안이나 머무르며 중 시켜 달라'고 1인 시위 하면서

버티는 한편 붓 가는 대로 그림을 그리며 찾아오는 예술인들과 소일한다.

어느 날. "엄마가 보고 싶어 현해탄을 건너 왔다"는 열네 살 앳된 소년이 수덕사로

김일엽스님을 찾아온다.

그 소년은 김일엽이 일본인 오다 세이죠와의 사이에 낳은 김일엽의 아들인 김태신이다.

모정에 목말라 있는 아들에게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고 스님이라 불러라"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김일엽을 보고,어쩜 저렇게도 천륜을 거역할 수 있을까?”라고 느낀 혜석

모정에 굶주린 그 소년이 잠자리에 들 때 팔베개를 해주고 젖무덤을 만지게 해준다.

나혜석 역시 모성애에 주려 있는 세 아이의 엄마다.이러한 모습을 바라본 김일엽은

속세의 연민을 끊지 못하는 나혜석이 중노릇은 못 할 거라고 생각한다.

김태신은 이 후에도 어머니 김일엽을 찾을 때마다 수덕여관에서 묵는데,

나혜석은 마치 자기 자식을 대하듯 팔베개를 해주고 자신의 젖을 만지게 하는 등

모성에 굶주린 일엽의 아이를 보살핀다.

나혜석은 수덕여관에서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김태신(후에 일당스님)에게

여러모로 영향을 끼치는데...

나혜석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청년화가 이응로도 자주 찾아와 이들과 함께

그림에 대한 이야기와 실습으로 시간을 보내고…….,

이러한 연유로 김태신도 후에 북한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 있는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로 유명화가가 된다

충남 홍성이 고향이고, 해강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던

청년 이응노에게는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돌아온 나혜석은 둘도없는 선배이자

스승이어서 자주 만나려 수덕여관을 들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함께 이 산속 외진 곳에서 아예 같이 기숙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누나 같은 스승이자 선배 화가일 뿐애정관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응로에게 파리의 환상을 심어 준다.

누나처럼 선생님처럼 따뜻하게 대해주던선배 화가 나혜석과의 인연으로 수덕여관에

정이 들어 버린 이응노는1944년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아예 수덕여관을 사들인 다음,

부인 박귀옥에게 운영을 맡기고6.25때에는 피난처로 사용하는 등….

6년간 살면서 수덕사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나혜석으로부터 꿈에 그리던 파리 생활과 그림 이야기를 들은 이응노는

1958년 드디어 21세 연하의 연인 박인경과 함께 파리로 떠나 버린다.

홀로 남은 그의 본부인 박귀옥이 여관을 운영하나 글자 그대로 소박떼기 청상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머물다 미련 없이 떠나 버린 두 사람과는 달리박귀옥 여사는 변치 않는 애정과 절개로

이국땅의 남편을 그리며 수덕여관을 지킨다.박귀옥여사가 외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데,

뜻하지 않게 이른바“동백림사건”으로 1968년 이화백이 납치되어형무소에 수감된다.

박귀옥은 한결 같은 지극정성으로 이화백의 옥바라지를 한다.출옥 후이화백은 수덕여관에서 몸을 추수리면서

그녀 곁에 잠시 동안 머무른다

새파랗게 젊은 여자와 떠나 버린 남편을병구완하는 박귀옥 여사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런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이 화백은 아마도 그 마음을 추슬러 여관 뒤뜰에 있는

너럭바위에 추상문자 암각화를 새겼으리라.....

그리고는 “이응로 그리다,”라는사인까지 남겨 놓은 뒤이 그림 속에 삼라만상

우주의 모든 이치가 들어 있다.”고말하고는 파리로 또 훌쩍 떠나버린다.

박귀옥 할머니는 이 암각화를 바라보며 어느덧 팔순을 앞둔 세월까지 남편을 기다려 온다

그러나 죽기 전에는꼭 다시 만나 볼 수 있으리라 실 날 같은 희망으로 살아 왔지만,

고암은 1992년 귀국전시를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장례식에도 가 볼 수 없는 박귀옥은 마지막 소원으로 이응로 화백의 유골이라도

돌려 받아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히고 싶어 한다.그녀는 고암이 파리로 떠날 때

그의 출세 길에 지장이 될까 봐 이혼수속을 허락해 준 것이 그렇게 후회스러울 수가 없다

이제 그녀는 고암에 대해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법적으로 남남의 처지였던 것이다.

그녀의 방에는 젊은 시절 남편과 함께 찍은 사진과고암이 남겨준 갈대꽃이 핀 강가에

홀로 서있는오리그림이 걸려 있다.고개를 내밀고 어느 곳인가를 하염 없이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꼭 자신의 처지 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2001년초 수덕여관 주인 박귀옥 여사가92세를 일기로 돌아가신다.

그리고 이 수덕여관도 폐허와 전설 속으로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제 수덕여관과 수덕사에 얽힌 추억의 인물은 김태신 한 사람만 직지사에 생존해 있다.

일본의 권위 있는 미술상인 아사히상을 수상하고,현재 김일성 종합대학에 걸려있는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일당스님 (김태신)

그가 바로 일제 시대 한국 최초의여자 유학생이자

당대 최고의 비구니로 칭송 받던 일엽스님의 외아들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공개돼 화제다.

67세에 불가에 귀의하여 80세 노인이 된노스님이 털어 놓는 그리운 나의어머니,

그리고 파란만장 했던 삶의 이야기... “

어머니란 존재는 각박하고 외로운 이승에 내 던져진영혼의 안식처 입니다.

나의 고독, 나의 절망,나의 기쁨, 나의 소망은 모두 어머니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로 인해서 갈증을 느꼈으며, 또한 어머니로 인하여 제 삶은 충만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뿌리치는 옷자락에 엉겨 붙은눈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일본에서 화가로 더욱 유명한 일당스님은 자전소설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를

출간하면서,그가 한국 비구니계의 거두 일엽스님(1896~1971)의 아들이라는 것을

세상에 드러냈다.

일엽 스님이 입적한지 31년 만의 일이다.

이로써 수덕사와 수덕여관에 관련된 6사람의 이야기가 생겨난다.

임종건/한남대 교수

 

 

 


 

 


 




 





 






 






관음바위의 전설

 

대웅전 서쪽 백련당 뒤편에 있는 이 바위는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신 성역으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온다.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가람은 극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여야 했으나 당시의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서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하였다.

이 여인의 미모가 빼어난지라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원근에 퍼지게 되니, 심산궁곡인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려 오는 사람이 연일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 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사람이 청혼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이 불사가 원만성취되면 청혼을 받아드리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이 청년은 가산을 보태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원만히 끝내고 낙성식을 보게 되었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이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묻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 뒤 기척이 없었다. 이에 청년이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여인은 급히 다른 방으로 사라지려 하였다. 그 모습에 당황한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여인은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라지니, 인홀불견(因忽不見)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크게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나 있었다.

이후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는 봄이면 기이하게 버선 모양의 버선 꽃이 지금까지 피고 있으며

그로부터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던 그 여인의 이름이 수덕이었으므로 절 이름을 수덕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와같은 광경을 본 정혜라는 청년은 무상함을 느끼고 산마루에 올라가 절을 짓고

그 이름을 정혜사라 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때부터 관세음보살이 현신하여 절을 크게 중창하고

바위속으로 사라진 이 곳에서 기도를 하면 모든 소원이 성취된다는 소문이 경향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이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근대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 만공스님의 가풍을 간직한

선찰로서 자칫 기복에 치우칠 우려가 있어 이를 더 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을 찾는 많은 불자들의 심원(心願)에 따라 수덕사에서는 이 성역에 참배 기도하는 이에게

관음의 신통묘용(神通妙用)한 가피가 얻어지를 기원하며 근래에 관음상을 봉조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고향인 예산에 볼일이 있서 시간이 있기에 수덕사와 덕숭산을 둘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