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산행 사진

(인천시) 문학산 산행

꽃거리 2016. 2. 18. 11:03

☞ 位    置  :  문학산(인천광역시 남구 문학동)

                  연경산(인천광역시 남구 학익동) 

☞산행일자 : 2016년2월16일

☞날     씨  :

☞카 메 라  ;  케논파워샷 G7X

☞산 악 회  ; 

☞산 행 지  : 연경산(177.5m) 문학산.213.m

☞산행시간 : 왕복 천천히.3시간30분

☞산행거리 :

☞참가인원 :

☞산행코스 :

☞이동수단 ;

☞특이사항 ; 산림청 100대명산선정 이유:

문학산(213 m)은 연수구 연수동, 청학동 및 남구 문학동, 관교동, 학익동에 접한 명산이다.

산 꼭대기에는 석성(石城)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남하하여

미추홀(彌鄒忽, 仁川)에 와서 비류는 문학산에 도성(都城)을 쌓고 미추홀국을 세우고 도읍하였다.

연경산(남구 학익동 문학레포츠공원내 위치 223m)은 문학산의 한줄기로 학익산이라고도 불리운다.

학익산은 멀리서 보면 학이 날개를 편 모양이라 해서 붙인 이름으로 학익산과 문학산 주봉이

학의 두 날개처럼 펼쳐져 동네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어서 동네 이름이 학골, 핵굴등으로 불리다,

1903년 학익리가 됐고 광복뒤 학익동이 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한다.

정상부근에 군부대가 있어 일반인의 접근이 통제된다.

문학산의 유래는 산기슭에 서원이 있는데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산의 형상도 학(鶴)과 같다 해서

문학산이 되고 또 문학산서원이 이 산 북서쪽 기슭에 있었다. 그리고 인천부의 남쪽이라서 남산(南山)이라고도 했다.

문학산 정상에 있는 정자에 올라서면 서쪽으로 인천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이고,

소래산은 물론 송학산과 인천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학산 자락엔 옛적에

두루미가 찾아 들었다고 해서 문학, 승학을 비롯한 산 이름과 청학, 선학, 학익 등 학(鶴)자가 든 동네 이름도 많다



 문학산의 유래


문학산은 인천도호부의 남쪽에 있다하여 남산, 학의 모습과 같다하여 학산, 산꼭대기에 봉수대가 있어

봉화둑산이라고 불려왔으며 성산, 배꼽산등의 명칭을 갖고 있는 산이다.

문학산은 길마산, 수리봉, 문학산정상, 연경산, 서달산 등이 동에서 서쪽으로 길게 이어져 산맥을 이루고 있어

우리고장 연수구의 지붕이라고 일컬을수 있는 산이다.

문학산(232m)은 이미 기원전부터 우리 역사속에 등장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건국설화에 비류가 미추홀에 도읍했다는 사실이 전해져오고 있는데 여지도서(與地圖書)

인천도호부 고적조에는 "문학산 정상은 미추왕(비류)의 고도(古都)라 하였고 안정복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문학산위에는 비류의 성기(沸流成基)가 있고 성문의 비판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성내에는 비류가 파놓은 우물이

남아있다"고 서술하면서 "동국여지승람에 그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을 개탄한다"고 아쉬워했다.

<세종대왕실록>에도 "인천에 성이 있어 이곳을 미추홀고성 혹은 남산고성이라고 불렀는데

성내엔 작은 샘도 있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문학산은 비류백제와 함께해온 인천지역의 성스러운 산이다.
문학산 정상에 처음 비류가 쌓았던 성은 여러차례 보강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1492년 임진왜란때

인천부사 김민선이 성을 수리하여 사민을 거느리고 왜적을 물리쳤다고 한다.

당시 왜군들은 문학산성 동문밖 1백여보 되는곳에 주둔했는데 수리봉 부근에는 왜적들이 쌓았다는

왜성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문학산성은 약220m정도가 남아있어 인천광역시 기념물 1호로 지정돼있다.

문학산 정상에는 김민선장군의 영혼을 기리는 사당인 안관당이 있었다. 인천도호부 주변마을 사람들은

매년 두번씩 제사를 올렸으며 일제시대때 안관당이 불타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안관당제를 유지시켜왔으나

문학산 정상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또한 문학산 정상에는 봉화대가 있어서 남쪽으로 안산정왕산의 정왕봉수와 북쪽으로 서구 가정동의

축곶봉수와 서로 응하였다. 이 봉화대로 인해 문학산 꼭대기가 배꼽모양같다고 하여

배꼽산, 봉화둑산이라고도 불리웠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