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사진

(예천군)용문사.초간정.석송령

꽃거리 2016. 3. 11. 15:59

 위     치  :경북 예천군 일원.

☞여행일자 : 2016년 3월9일

카 메 라  ; 케논파워샷 G7X

날     씨  :

산 악 회  ; 

☞여 행 지  : 용문사.초간정.석송령

☞여행시간 : 시간 분

☞여행거리 :  .km

참가인원 :

☞여행코스 :

이동수단 ;

☞숙      박 ;

☞백대명산 ; 

 특이사항 ; 


 

 

 용문사는 870년 (신라 경문왕 10년) 두운 선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신라를 정벌하러 내려가다 이 사찰을 찾았으나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했는데,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였다 하여 용문사라 불렀다고 합니다.
 고려 명종 때 ‘용문사 창기사’로 개명했으나 조선 세종대왕의 비 소헌왕후의 태실을 봉안하고 ‘성불사 용문사’로 다시 고쳤고, 정조 때 문효세자의 태실을 이곳에 쓰고 ‘소백산 용문사’로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시 승병들의 지휘소로 이용되었던 자운루가 용문사에 아직도 남아있어 호국불교의 기풍을 후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윤장대(보물 684호)를 비롯 성보문화재 10여점이 현존하며, 조선 숙종 때 조성된 목각탱화(보물 89호)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특히,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한 윤장대를 돌리면 번뇌가 소멸되고 공덕이 쌓여 소원이 성취된다고 하여 예로부터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물 제684호. 높이 4.2m, 둘레 3.15m.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회전식 경장(經藏)으로, ‘전륜장(轉輪藏)’이라고도 불린다. 보광명전 왼쪽의 대장전(大藏殿) 안에 자리하고 있는데,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대칭하여 각각 1기씩 놓여 있다. 곧 불단 앞의 좌우 마룻바닥을 단면 8각으로 뚫고 회전축을 세운 뒤, 지도리를 놓아 경장을 받치고 회전축을 천장에 고정시켰다.

경장은 단면이 8각으로, 치밀하면서도 정교하게 짠 공포(栱包)를 놓고서 겹처마의 팔작지붕을 올린 다포(多包)계 건물의 모습이다. 곧 각 면에는 문이 하나씩 달려 있어, 마치 8각의 목조건물을 축소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회전이 잘 될 수 있도록 팽이 모양으로 뾰족하게 만든 아랫부분은 기둥과 상인방(上引枋), 창방(昌枋) 사이에 돌려 붙인 연이은 덩굴무늬의 파련각(波蓮刻) 장식인 낙양처럼 조각하였고, 한쪽 모서리에는 길다란 손잡이를 두어 경장을 돌릴 수 있도록 하였다. 손잡이의 윗부분에는 각 면마다 난간과 함께 문짝을 달았다. 난간은 24개의 연잎[荷葉]으로 꾸며져 있고, 각 면의 문짝에는 작은 자물쇠 고리가 달려 있다. 특히 8면의 문짝은 좌우로 무늬가 다른데, 한쪽의 4개 문짝은 아름다운 꽃무늬 창살로 장식된 반면, 다른 한쪽의 4개 문짝에는 빗살무늬 창살이 면을 도려낸 투조(透彫) 기법으로 정교하게 꾸며져 있다. 문짝을 열면, 각 면마다 서가(書架)와 같은 단을 두어 경전을 넣고 꺼내볼 수 있게 하였다.

윤장대는 대장전이나 장경각(藏經閣)처럼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곳이지만, 그 자체가 신앙의 대상인 불교 공예품이기도 하다. 현재 기록이나 파손된 몇몇의 사례를 찾아 볼 수는 있지만, 특이한 모습을 갖추고서 완벽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용문사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에는 1173년(명종 3)에 자엄대사(資嚴大師)가 대장전과 윤장대를 건립하였다고 하였지만, 사적기(事蹟記)에는 1670년(현종 11)에 고쳐 수리하였다고 하였으므로, 윤장대는 1670년 쯤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의 정자 초간정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전20권)을 저술한
조선 중기의 학자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가 1582년(선조 15)에 지은 정자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612년(광해군 4)에 고쳐 지었지만
병자호란으로 다시 불타 버려 1642년(광해군 2)에 후손 권봉의가 다시 세웠다.
현재의 건물은 1870년(고종 7) 후손들이 새로 고쳐 지은 것이다.
정자는 용문면 원류마을 앞 굽이쳐 흐르는 계류 옆 암반 위에 막돌로 기단을 쌓고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사각기둥을 세우고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왼쪽 2칸에 온돌방을 만들어 사방으로 문을 달고, 그 외의 부분에는 대청마루를 깔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정자의 현판을 잃고 근심하던 종손이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떠오른
정자 앞 늪을 파보았더니 거기서 현판이 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권영기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종 목 천연기념물  제294호 
명 칭 예천 천향리 석송령 (醴泉 泉香里 石松靈) 
분 류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민속 
수량/면적1주
지정(등록)일1982.11.09
소 재 지 경북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 804외 3필 
소유자(소유체)농림수산부 외

예천 천향리 석송령에 대한 설명입니다.
석평마을의 마을회관 앞에서 자라고 있는 예천 천향리의 석송령은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1m, 둘레는 3.67m이다.
나무는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어 전체적으로 우산모양을 하고 있으며, 곁가지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곳곳에 돌로 된 기둥을 세워 놓았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약 600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석간천을 따라 떠내려오던 소나무를 지나가던 사람이 건져서
이 자리에 심은 것이라고 한다. 그 뒤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이라는 사람이 ‘석평마을에 사는 영감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으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자신의 토지 6,600㎡를 물려주고 등기까지 내주어 재산을 가진 나무가 되었다. 또한 고 박정희 대통령이 500만원을 하사한 일도 있다. 마을에서는 석송령의 재산으로 장학금을 조성하여
학생들에게 주고 있으며 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화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예천 천향리의 석송령은 마치 사람처럼 재산을 가지고 세금과 장학금을 내는 등 세계적으로 그 예를 찾기 어려운 나무로 우리민족의
나무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예천궁 한정식
주소 경북 예천군 예천읍 효자로 64-1
(지번) 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233-2
전화054-654-40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