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치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치리에 있는산.
☞산행일자 : 2016년5월29일
☞카 메 라 ; 캐논 파워샷 G7X.
☞날 씨 : 맑음
☞산 악 회 ;
☞산 행 지 : 덕숭산 (德崇山)수덕사)(495M
☞산행시간 : 시간 분
☞산행거리 : .km
☞참가인원 : 3명
☞산행코스 :
☞이동수단 ; 승용차
☞숙 박 ;
☞백대명산 ;
☞특이사항 ; 지역 주민들이 소금강이라고 할 만큼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경관이 수려하고,
도립공원으로 지정(1973년)되어 있는 점 등을 감안하여 선정
백제 제29대 법왕 원년(599년) 지명법사가 창건한 수덕사(修德寺),
보물 제355호인 마애불과 덕산온천이 유명
덕숭산 소개
덕숭산은 호서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예쁘장하고 아담한 산으로 기슭에 수덕사를 품고 있으며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20㎞, 덕산면 사천리에 위치하고 있다.
이 지방 현인들이 모여 수양을하다 산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하여 수덕산이라고도 한다.
1973년 3월 6일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해발 580m의 덕숭산은 기암괴석이 풍부하여 바위들이 사람의 두개골이나
노적가리, 사나운 짐승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지닌 절묘한 형상을 지니고 있다.
절경으로는 원효봉과 석문봉, 덕숭산과 해태바위등이 있다. 또한 수덕사를 비롯하여 정혜사, 만공탑,
여승당, 보덕사 등 많은 문화재가 있으며 충의사와 덕산온천 등 명소가 있다.
수덕산은 수덕사 등 사찰산행과 온천산행을 겸할 수 있지만 등산코스로는 가족나들이 코스 정도로 짧아
다소 아쉽다
윤봉길의사 생가 광현당
안중근 의사와 함께 항일 독립운동에 큰 공을 세운 윤봉길의사가 태어나 살던 곳이다.
그가 살던 집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그의 유품들이 보존되어 있고, 그의 사당인 충의사도 있다.
사적지로 지정된 윤의사의 생가는 시량리 목바리(沐溪)라 불리는 곳에 있다.
이곳은 가야산과 덕숭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합해져 목바리 앞에서 작은 삼각주를 이루었다가 다시 덕숭산과
용봉산 사이에서 내려오는 시내와 합해져 온천 뜰로 빠져나가는 곳이다.
작은 시내가 만든 삼 각주에 윤의사의 생가인 광현당(光顯堂)이 있다.
현재 경내에는 윤의사의 동상과 그의 유품을 전시한 매헌기념관이 있다.
저한당
윤의사가 성장한 곳으로 1972년 8월까지 의사의 유족이 살았고, 1974 년에 증수되면서 저한당
(抵韓當 : 한국을 어려운 데서 건져낼 집이라는 뜻)이라 명명되었다. 1911년(4세) 3월에 부모를 따라
광현당에서 이 집으로 옮겨와 1930년(23세) 망명에 오를 때까지 생활했다.
서울시 서초구에 윤봉길의사 기념관이 있다.
덕산온천
덕산온천은 수덕사로 가는 중간 2㎞지점에 위치하고 있고 약 136년전 순조왕때 약수로 개발되었으며
1927년 수질분석에 의하여 "지구유"라 하여 국내에서 제일 우수한 수질로 밝혀졌다.
수온은 섭씨 52 ℃ 안팎으로 수질은 알칼리성과 유황성분의 천연방사능천이다.
지하 210m까지 파고 들어가 끌어올린 온천수는 신경통, 만성피부염, 류마티스, 동맥경화등에 효험이 있다.
유일하게 온천수로서는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덕산온천은 인파가 적어 비교적 여유있는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인근에 덕숭산, 충의사, 매헌 유적지 등의 명소를 거느리고 있어
다양한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소림초당
아직 세우지못한 정상석
예산에선 유명한 삼선식당
1인당 45000원 한정식이다
수덕사의여승 일화
일당 김태신 스님께서는 2014년 12월 25일
새벽 1시에 향년 93세로 원적에 드셨다.
일당 스님은 1922년 9월 일본의 도쿄에서 <오다 세이죠>라는
세계적인 은행가 아들과 당시 유학중이던 한국의 신여성
김일엽 사이에 태어나 한일근대사의 굴곡과 오욕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낸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로 꼽힌다.
오다 세이조<일당스님의 부친>는 아버지를 은행
총재로 둔 일본최고 명문가의 아들이며
당시 규슈제국대 학생이었다. 남자 부모님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데,
이때 둘 사이에 아들<일당>이 하나 태어난다.
이 아들은 아버지 친구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라나게 되며 이 사람이 한국과 일본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동양화가 일당<일엽스님의 아들>
스님이며 이름이 “김태신”이다.
일당스님은 지금도 김천의 직지사에서 활동 중이며
해방직후 김일성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김일성 종합대학에 지금도 걸려있다 한다.
당시 그 일로해서 조총련계로 오해받아
작품 활동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오다 세이조와의사랑도 아픔으로 겪은 그녀는
곧, 일본에서 돌아와 수덕사의 여승이 된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랑이 세파에 으스러지는
아픔을 이겨내고, 또 다른 참 인생의
행로를 불자의 길로 선택한 것이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 어린 아들이
수덕사를 찾아 왔는데 불자가 되었으니,
“속세에 맺어진 너와나의
모자인연은 속세에서 끝났으므로
더 이상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 하며
모질게도 모자의 정을 끊고자 이역만리
찾아온 어린자식을 절 밖에 재웠다 한다.
이때 김일엽의 절친한 친구인 나혜석이
수덕사 밖에 있는 수덕여관에서 같이 지내며
어머니 처럼 자신의 젖가슴도
만져보게 하고 그림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때 흘리지 못한 눈물이 가슴에 쌓여 해탈로 녹아내렸을까 ?
비구니로써 그의 인생이 한국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길 만큼 성공적인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가수이자 음성 포교사인 “수덕사의 여승”의
주인공 송춘희씨를 기념하기위하여
절 앞에 있는 주차장에 노래 기념비를 세웠으나
2-3일후 수덕사의 스님들이 이 기념비를 무너뜨렸다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화가이며 문장가인 나혜석이
그 한명이고, 나머지 한명은 시인으로 유명한 김일엽이다.
이 신여성 세 사람은 조선사회 남존여비의 실체가
그대로 존재했던 시기에 시대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하고
불꽃처럼 살며 사랑을 위해 목숨을 건 여인들이다.
그 연유는 아마도 노래의 가사 내용이 스님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나 싶다. 그렇다 해도 중생을 구제하고
아픔을 함께 해야하는 스님들께서 속세의 작은 정표하나
가슴으로 안아주지 못하는 처사가
못내 아쉽기만 한 것은 내가 불자가 아니어서 그런걸까 ?
일엽 스님께서 살아계셨다면 기념비는
어찌 되었을지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
무심히 부르고 흘러버릴 대중가요일 뿐인
“수덕사의 여승”에 이렇게 딴지를 걸어 보는건,
이 노래가 만들어진 시기가 60년대이니
이때엔 일엽스님께서 수덕사에 살아 계실 때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노랫말을 쓴이가 일엽스님의 인생을
안다면 아마도 그런 가사가 나왔음 직 하지 않은가.
이 글에 인용된 사실적 기록들은 일엽 스님의 아들 일당스님
(김태신)이 최근 발표한 자전소설 어머니 당신이 그립습니다
에서 발췌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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