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산행 사진

(서울.구리시)아차산(峨嵯山) 용마봉(龍馬峰)망우산

꽃거리 2017. 11. 6. 11:09

위     치  :서울 광진구 광장동과경기도 구리시에걸쳐 있는 산

산행일자 : 2017년11월5일

카 메 라  ; 캐논 파워샷 G7X 

날     씨  :흐림

산 악 회  ; 

산 행 지  : 아차산(峨嵯山.287m) 용마봉(龍馬峰.347m)망우산

산행시간 : 시간 분

산행거리 :  .km

참가인원 :

산행코스 :

이동수단 ;

☞숙      박 ;

☞백대명산 ; 

 특이사항 ; 

 

아차산은 ‘阿且山’으로도 표기하며, 옛 기록에 보면 아단산(阿旦山)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아차산의 원 이름은 아단산인데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여 아차산· 아차산성으로 변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아차산은 높지도 빼어나지도 않지만, 산 위에 서면 서울시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산과 시가지 전체를 거의 볼 수 있다.

특히 굽이치는 한강의 푸른 물과 강변의 경관을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아차산은 워커힐호텔이 한강변을 바라보며 들어서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한편으로 청동기시대 유적이 발견되고

삼국시대 백제의 산성이 남아 있는 곳으로 주목되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백제가 처음 오늘의 서울 부근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을 때 남하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막기 위하여 아차산에

성을 쌓았던 것이다. 이 성을 아차산성 또는 아단성이라 불렀는데, 백제 책계왕 1년(286)에 이를 중수하였으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漢城)을 치고 개로왕을 사로잡아 이 성 밑에서 목을 베어 죽인 바 있다.

이후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한강유역을 놓고 고구려와 신라·백제가 서로 쟁탈전을 벌였다.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장군도 신라에 빼앗긴 한강유역을 되찾고자 이 아차산성에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설화가 전한다. 아차산에서는 백제의 유구와 고구려의 군사 보루와 석축 등이 오늘날에도 확인되며,

많은 석실고분군이 산재되어 있음도 볼 수 있다. 한편 고려시대에는 남경 오덕구의 하나로 각광받아 북쪽에서

남쪽으로 달려간 남행산으로 이름 보여지며, 그외 기록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조선왕조가 개창되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니 기존의 한양에 살던 주민들은 양주땅으로 옮겨지게 된다.

그곳이 동촌(東村) 대동리(大同里)인데 옮겨간 양주의 부치(府治)가 있던 곳으로 양주군 고양주면에 해당한다.

이곳이 곧 아차산의 남쪽 기슭인 것이다. 따라서 아차산은 풍수지리적이나 사회·경제적인 면에서

오늘날 북악을 주산으로 하는 도성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 때부터

아차산 서쪽 기슭은 사냥터로 각광을 받아 국립목마장이 설치되었다. 즉 사복시(司僕寺) 살곶이목장이 설치되어

이후 역대 왕들에 의해 광진구 뚝섬에 성덕정(聖德亭)과 화양정(華陽亭)이 마련되고 기마 군사들의

열무행사를 시행하였다. 이 목장의 동쪽 경계가 바로 아차산이었다. 또 지금은 모두 이장되었지만

일시나마 익종의 유릉(綏陵)이 아차산 용마봉 아래에 위치하였다. 본래 유릉은 천장산(경희대 뒷산) 북동편에 있었는데

헌종이 즉위한 뒤 그의 아버지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1846년에 이곳으로 능을 옮기고 일시 사복시목장을 폐지하였다.

그후 1855년 다시 검암산(구릉산)으로 옮겼다. 또 순종 황제의 황후인 순명황후(純明皇后) 민씨가 황태자비로

1904년에 세상을 떠나자 용마봉 자락에 유택을 마련하니, 이곳이 유강원(裕康園)으로 오늘날

어린이대공원 자리가 된다. 그후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남양주시 금곡의 유릉(裕陵)으로 옮겨졌다.

조선초에는 아차산 동남쪽에 태종의 후궁인 명빈(明嬪) 김씨의 묘역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아차산 남쪽에는 일찍이 한강을 건너는 광나루가 개설되어 도성에서 충청·강원·경상도로 향하는 교통로가 발달하였다.

따라서 흥인문과 광희문을 지난 교통로가 살곶이다리가 있는 전관원(箭串院), 광나루의 광진원(廣津院)으로 이어져

교통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아울러 기록에는 아차산봉수가 있어 남산 제1봉화에 연결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조사결과 봉수대의 위치는 신내동에 있는 봉화산인 것으로 밝혀졌다.

1950년 6·25전쟁 때 국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탈환을 목전에 두고 한강도하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이어 9월 26일 국군제17연대 1대대와 3대대가 아차산 줄기를 따라 북진하여

오후 반나절을 지나서 용마봉을 점령하고 다시 292고지를 확보하였다.

이렇게 망우리고개에 도착한 국군은 진지를 구축하고 경춘국도를 차단하였다.

그러나 이날부터 아차산 일대에서 국군과 인민군과의 격전이 3일간 전개되어 인근 주민들이 아차산으로 피난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그리고 6·25전쟁에 전사한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힐이

남쪽 넓은 한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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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사(永華寺)소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절은 원래 672년(신라 문무왕 12)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양사(華陽寺)라고 이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의상이 중국에서 돌아와

태백산에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다시 전국에 화엄10찰을 지어 전교(傳敎)했다고 하였는데

이 화엄10찰 중에는 화양사가 들어있지 않다. 또한 현재 절에는 이 시기에 해당되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으며,

미륵전에 봉안되어있는 미륵불이 고려 말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바 늦어도 고려 말기 이전에는

절이 창건되어 있었다고 추측해볼 따름이다.

창건 이후 절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1395년(태조 4)에

이 절의 등불이 궁궐에까지 비친다고 하여 용마산 아래의 군자동으로 옮겼다가

뒤에 다시 중곡동으로 옮겼다고 전한다.

이후 절은 조선 후기에 번창했던 것 같다. 서울시립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한성동역도(漢城東域圖)』에 나타난 화양사의 모습은 중앙의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회랑이 둘러져 있고

미륵당이 앞쪽에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만든

김정호가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1851(철종 2)에서 1856년(철종 7) 사이에 편찬한 『여도비지(與圖備志)』

에도 화양사란 절이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화양사는 19세기경까지 사세를 유지해 왔고 또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그후 1907년에 지금의 위치로 절을 옮겨 영화사로 고쳐 불렀으며, 1909년에 도암(道庵)스님이 산신각과

독성각을 세웠다고 한다. 이후 1992년에 송월주스님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는데

옛 극락전을 허물고 대웅전을 건립하는 것을 시작으로 일주문, 설법전, 불교회관 등을 연차적으로 건립하였다.